728x90

우리는 ‘조용한(?) 나날’을 산다.

아침에 일어나고 일터로 나갔다가 반복되는 일에 하루를 보내고

저녁이 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신의 보금자리로 돌아온다.

이따금 익숙하지 못한 일들도 일어나지만 사실상 그것도 조용한 일일 뿐이다.

이따금 타인에게 말걸기를 해 보기도 하지만 그것도 시끄러운 무엇은 아니다.

조용하다는 표현이 어색하다면 일상적이라면 어떨까?

조용하고 일상적이라면 변화가 없다는 말과도 통한다.

변화가 없는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면 일상적이어서 전혀 아프지도 않아야 할 텐데

공지영의 <조용한 나날>은 아프다.

이상하게도 아프다.

 

 

 

이 사랑, 이 가슴이 저밀 것 같던 사랑도 그것이 그의 것이든 나의 것이든,

허망함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면 나는 내 사랑에 대해 자유로워진다.

유리창에 어리던 그의 눈빛이 지워지고

아주 다는 아니지만 적어도 얼마간은 나는 홀가분해진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나는 그를 더 사랑할 수 있다.

……짧은 시간에도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어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랑은 사실 허망하므로 이 순간만이 전부라는 걸 나는 이제 알고 있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예전의 나는 사랑을 믿지 않았지만 이제 나는 사랑하는 나 자신을 믿지 않는다.

(공지영 <조용한 나날> 부분)

 

사랑이 허망하다는 생각,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이 결국 사랑에 대한 자유로움으로 나아간다.

허망하다는 생각이 오히려 사랑을 할 수 있게 하다니.

허망함에 대한 인식이 그를 더 사랑할 수 있다는 생각과 결부되다니.

사랑의 영원함과 사랑의 절대성을 믿으면서 살아온 내 의식과는 엄청난 괴리를 지니며

내 영혼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실상 그건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다.

사랑의 영원함과 진실함을 믿는 건 그 자체가 허망하다.

사랑은 어디에도 없다.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진실을 믿지 않을 때 오히려 사랑이 가능하다.

사랑이 영원하다는 걸 믿지 않을 때 짧은 시간에도 사랑을 고백할 수가 있다.

그 개념에 대해 자유로우니까. 최소한의 책임에 대해서도 자유로우니까.

자신의 진실의 여부에 대해서도 자유로우니까. 사랑에는 이미 허망함이 전제되어 있으니까.

사랑한다고 믿는 그 순간만이 사랑이 영원하다.

순간이 곧 영원이다. 그 순간 사랑했다면 그건 이미 사랑이다.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사랑의 영원함을 보면서 감동하고 눈물을 흘리는 건

그 순간의 진실을 믿기 때문이다.

그렇다.

사랑은 아세틸렌 섬광처럼 순간적으로 벌어지는 마음의 움직임이다.

예전의 나는 영원한 사랑을 믿지 않았지만 이제 나는 사랑하는 나 자신을 믿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떤 사랑은 일종의 상처 입히기일 수도 있으니까.

 

 

 

이 순간이 지나고 일분 후 혹은 삼십 초 후,

서로를 애틋하게 어루만지던 그 손가락으로

우리는 서로를 가장 치명적으로 상처 입힐 수 있는 것이다.

확률은 반반이다.

그 확률은 어떤 이성적 예지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유는 오직 하나, 사랑하고 있으니까 상처 입히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방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이므로.

무엇이 그에게 가장 상처 입힐 수 있는지 알게 되는 것이고,

그래서 그런 순간에 언제나 더 사랑한 사람이,

더 많이 드러낸 사람이 더 상처 입는다.

……하지만 내가 냉정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생(生)에 지불해야 할 수업료를 톡톡히 치르고

나는 이제 어느 정도 자신의 감정을 조절할 줄 알게 되었다.

더 많이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서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공지영 <조용한 나날> 부분)

 

전혀 무의미한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상처가 없다.

상처는 치열한 삶의 결과다.

상처가 많다는 건 그만큼 치열한 삶을 살았다는 증거다.

사랑만큼 치열한 삶이 있을까?

이미 허망한, 불가능한 그것을 향해 달려가는 전적인 무모함,

거기에는 이미 상처가 전제되어 있다.

사랑한다는 건 상처 입는 것이고 상처 입히는 것이다.

대상에 대해 무지한 상황이라면 오히려 상처는 존재하지 않는다.

상대방에 대한 앎이 바로 상처를 이끈다.

관계의 모두가 상처가 되지 않는다.

상대를 안다는 건 그 상대가 가장 상처 입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안다는 것과 다름 아니다.

결국 더 많이 드러낸 사람, 더 많이 사랑한 사람의 상처가 더욱 크고 깊다.

그러나 더 많이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서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더 많이 사랑해도 사랑이고 아주 적은 영혼으로 사랑해도 사랑이다.

실상 공지영의 아픔은 여기에 있다.

그런 공지영을 바라보는 내 아픔도 여기에 있다.

더 많이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서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더 사랑할수록 더 많은 상처를 입는다는 그러한 진실이 아픈 것이다.

그 사랑의 대상이 국가이든 민족이든 민주주의이든,

아니면 일상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이든 다를 바가 없다.

공지영의 그런 아픔이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라는 점이 날 아프게 한다.

언제나 남은 자는 나이고 모든 대상들은 저만치에서 뛰어가고 있다.

열심히 뛰어가면 그들은 날개를 달고 날아가 버린다.

난 날 수 있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오히려 남아서 잔치상을 치워야 하는 게 내가 서 있는 자리다.

그래서 아프다.

 

 

 

이 세상에 진실은 없네,

이 세상에 정의는 없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네,

그대 내 앞에 있고 나 그대 앞에 있을 뿐.

하지만 그대조차 멀어지겠지.

지금, 아름다워서 그대 내 것이지만, 아아 죽음이 온다, 죽음이 온다.

나는 환청으로 웅웅거리는 머리를 견디기 위해 지그시 이를 문다.

소리는 멀어져가고, 아마도 긴 강을 건너며 멀어져가고,

시든 풀잎 위에서 밤이슬 방울들이 스러지고 있다.

나의 길고 긴 생도 밤이슬 방울을 따라 모래알처럼 흘러내린다.

푸른 전구.

나는 눈을 내리깐 채, 수첩을 꺼내 오늘 자 일기를 메모한다.

(공지영 <조용한 나날> 부분)

 

그래도 나는 살아간다.

이 세상에 진실도 정의도 영원한 것도 없다는 진실을 이미 깨달았기 때문에.

그러면서도 마지막으로 남은 자가 되어 더럽혀진 잔치상을 치워야 하는 존재가

나임도 깨달았기 때문에.

그러한 깨달음이 나를 살아가게 한다.

이미 실존하는 진리니까.

도망갈 곳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으니까.

이 세상에서 내게 남겨진 유일한 진실은 내가 가끔 울었다는 사실뿐이라고 뮈쎄는 그랬다.

어쩌면 가끔 웃기도 했을 게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화를 내기도 했고

사랑이 집착이 되어 내게 무게로 주어진 적도 있었을 게다.

하지만 오래도록 열망했지만

결국 생의 어떤 부분도 지우개로 지울 수 없다는 것을 나는 깨닫는다.

생보다 진한 지우개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수없이 많은 일들이 일어나지만 결국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이렇게 오늘 일기를 마무리한다.

그 마지막 표현조차도 아프다.

 

 

 

아무 일도 없었다, 오늘도 조용한 하루였다,라고.

(공지영 <조용한 나날> 부분)

'정직한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혜롭게 화내는 방법  (3) 2020.07.05
반려견 입양시 주의사항  (4) 2020.07.04
Remembering you  (6) 2020.06.14
냉정한 부부의 세계  (1) 2020.06.07
나는 된다 잘된다  (0) 2020.06.06

+ Recent posts